귀농 10년, 주민과 더불어 사는 꿈을 꾸다
귀농 10년, 주민과 더불어 사는 꿈을 꾸다
  • 류영우 기자
  • 승인 2009.08.27 16:40
  • 호수 1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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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산·권원오 부부

'시골로 가고 싶다.'
이 말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더욱이 이 시골이 '고향'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은 단지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욕심을 하나둘씩 버리고, 정신적인 행복한 충만감을 느끼며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려는 이들에게 시골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셈이다.
화려한 도시의 유혹을 과감히 끊고, 그들도 시골을 택했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낯설다면 낯선 시골에서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귀농의 과정은 결코 보랏빛 청사진으로 포장되지는 않았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다
김성산(45)씨와 권원오(41)씨.
그들 부부가 보은읍 봉평리에 자리잡은 것은 10년 전이다.
98년. 보은군에 큰 수해가 난 후 이틀 뒤 그들은 생면부지의 보은땅에 내려왔다.
경기도 안산에서 번듯한 직장생활을 했던 김성산씨였지만 IMF는 그를 거리로 내 몰았고, 갑자기 찾아든 명마는 그를 시골로 향하게 했다.
구안와사.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몸도 자유롭게 움직일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농촌에서 편안하게 요양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남편을 믿고 따라온 부인이 있었고, 두 자녀도 있었다.
1천200만원을 들고 내려온 낯선 땅에서 그는 400만원을 투자해 조그마한 트럭을 한 대 구입했다.
그리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들고 도시로 향했다.

“처음 보은땅에 내려왔더니, 채소값이 폭락해 주민들이 정성들여 지은 농산물을 모두 버리더라구요. 마땅히 수익도 없었고, 버릴 채소면 제가 한 번 팔아보겠다고 했죠. 주민들이 버리는 채소들을 들고 안산을 다시 찾아 갔어요. 함께 직장생활을 했던 친구들도 찾아가고 청주에 있는 시장에도 찾아갔어요. 현지에서는 채소값이 폭락했다고 하지만 직접 찾은 시장에서는 농촌의 현장과는 달랐습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시골에서 직접 가져왔다고 하자 호응도 좋았습니다."

낯선 땅에 내려와 막막하기만 하던 김성산씨 가족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이 희망은 단순히 이들 가족에 국한되는 희망은 아니었다. 그리고, 농촌의 경쟁력이라는 희망을 그들 가족의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바지런히 키워나갔다. 어떤 어려운 세파도 희망으로 둘러 쌓인 울타리 안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는 없었다.

◆고난은 끝이 아닌 시작
참 힘들게 살아온 10년이었다. 처음 보은땅에 자리를 잡기 위해 지역의 관공서를 찾았을 때, 그들이 한 첫 마디는 바로 "보은에 아는 사람 있느냐?"였다.
"없다"는 그의 대답에 돌아온 것은 "뭐 하러 보은에 왔느냐?"라는 것이다.

군의 수장도 "진짜 귀농인의 얘기를 듣고 싶다"며 그의 연락처를 가지고 갔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군의 수장조차도 이럴진데, 다른 공무원들은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것이 김씨의 하소연이다.
군의 무관심속에 그는 6년을 넘게 마을의 빈집을 찾아다니며 살아야 했다. 6살, 4살이었던 두 아이는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유치원으로 향해야 했고, 학교에 입학해서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밭으로 나가야 했다.

"고추도 고르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고추도 따야 했어요. 오죽했으면 아이들이 '아빠, 콩농사는 이제 안 하면 안돼?'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남편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자유롭게 가눌 수 없는 몸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이 땀 흘려 농사 진 결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보은읍에 있는 음식점이란 음식점은 안 돌아본 곳이 없었다. 음식점을 돌며 일반 고추 외에 청양고추나 아삭이 고추가 필요하다면 그 다음 해에 음식점에서 필요로 하는 농산물을 재배했다. 철저하게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원하는 시기에 공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음식점에 농작물을 배달했고, 무거운 짐은 몸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부인이 짊어졌다. 10년 전 직장생활을 했던 안산과 청주, 서울 등 그들의 결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들이 재배한 농작물들은 이처럼 직접 판매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그리고 2천500평의 땅에서 재배한 그들의 결실은 연 소득 3천만원이란 또 다른 결실로 돌아왔다. 몸이 힘든 건 현실이지만 노동의 대가는 정직하다는 것을 땅에서 배웠고, 그 속에서 김씨는 농촌생활의 매력을 느껴가고 있었다.

“농사가 몸은 고생되더라도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움직여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실패해도 내가 만든 일이니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것도 농촌생활의 장점이죠."

도시에서는 여가생활을 위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야하지만 농촌은 일상이 여가생활이라고 말한다. 일 없이 논과 밭을 거닐며 자신이 키우는 농작물과 대화한다는 김씨는 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희망을 일구다
생명의 시대를 강조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가장 강력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단어는 바로 '친환경농업'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환경농업 현실은 그 내용에 있어 미약한 것 또한 사실이다. 햅쌀이 익어가는 들녘은 분무기를 타고 쏟아져 나오는 농약으로 가득 채워졌고,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비료 값을 원망하면서도 대다수 농민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화학약품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친환경농업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엔 그 전망이 여전히 불안하고, 나날이 떨어지기만 하는 농산물 가격에 농민들은 지쳐만 갔다.
하지만 김성산씨는 농촌의 미래를 친환경농업에서 찾고 있다.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고, 또 그들이 원하는 농산물을 생산해 내야 한다는 진리 또한 얻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친환경농업'에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들에게 내가 지은 농산물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고, 또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친환경농업밖에는 없습니다.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 판매할 경우에는 더욱 그 가치가 높아지구요. 친환경농업으로 지은 농산물이라면 판로는 걱정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귀농 10년 차. 친환경농업을 이야기하며, 어느 정도 지역에서 자리 잡고 있는 그였지만 아직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의 과정 또한 성공을 위한 과정이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성공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또 다른 희망을 꿈꾸며
김성산씨 부부는 또 다른 희망을 이야기했다. 바로 어려울 때 함께 해 주었던 마을주민과 더불어 잘 살아가는 희망이다.

“빈집을 전전하고 있을 때 쌀이 떨어질 때가 되면 어떻게 아셨는지 마을 어르신들이 쌀을 한가득 가져다 주시곤 했어요. 어려울 때 마을주민들에게 받은 사랑, 이제는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바로 마을의 심부름꾼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일꾼으로써 그는 반장일을 맡았고, 농약이나 비료를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 또한 그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궁극적인 꿈은 따로 있었다. 바로 주민들과 더불어 잘사는 마을이 되기 위한 '농촌체험마을'운영이다.

그를 따라 2000년에 보은땅에 자리를 잡은 둘째 형 김성갑(48)씨와 그에 앞서 97년에 정착한 큰 형 김성집(52)씨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다.

이미 몇 해 전부터 그의 둘째 형 김성갑씨와 함께 대전에 있는 한 유치원과 도농 교류 체험행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150여명의 유치원생들과 둘째 형의 과수원에서 사과따기 체험을 하고 있으며, 마을의 농산물도 도시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함께 판매해 나가고 있다.

“염소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단순히 사과만 따고 시골 모습만 보고 갈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우리 마을을 찾아, 사과도 따고 염소도 만져보고, 친환경 채소도 먹어보고. 이런 소통을 통해 마을을 알리고, 마을의 농산물도 함께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을 정리해 마을 주민들과 2, 3년 이내에 '봉평리 농촌체험마을'을 완성해 볼 생각입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어갈 쯤, 방 문을 빼곰히 열고 한 학생이 얼굴을 내민다.
둘째 아이였다.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에 있는 첫째 아이는 지금 진주에 가 있다고.
부모님과 함께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자랐지만 이제는 반듯하게 성장해 제 몫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 부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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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형님 2009-09-01 15:14:19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이런 사연이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안산에 거주 중 입니다. 구상하고 계신 그림 꼭! 완성 하시기 바랍니다.

james park 2009-08-31 15:26:34
jk 아빠,엄마네요. 함께계신 얼굴보니 반갑습니다.
안산에서 옆에 사실 때 도움많이 받았습니다.
두 분이 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하셔서 생각많이 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