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열매 같은 망개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사랑의 열매 같은 망개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0.12.16 10:24
  • 호수 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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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길따라 … 10구간(마로한중 도계~525봉~마차고개~임실~적암도계까지 7㎞)

지난 12일 한파주의보. 영하 10도 이상 떨어진다는 기상예보도 있어서 사람이 얼마나 참여할까 걱정이 됐다. 혹시 네, 다섯 명만 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우리의 산하를 두 눈에, 그리고 두발로 밟아보겠다는 주민 13명이 이번 둘레산행 10구간에 산행에 참여해 아름다운 족적을 남겼다.

우리 '보은사람들'신문과 속리산악회(회장 조진)에서 매달 안내하고 있는 둘레산행 종주 길에 1만 군민, 아니 2만 군민들이 함께 하는 것은 꿈일까. 1만, 아니 2만 군민들이 둘레산 능선마다 줄을 서는 그날은 언제일까.

이번 산행구간 마로면 한중리도계~소여~임실~적암리 도계와 이웃하고 있는 지역은 경북 화남면 중눌리, 경북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 화남면 평온2리(벙디미)이다.

 

▲ 영하 10도를 기록하는 맹추위 속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의 산하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 둘레산행을 감행한 용감한 군민들이다. 하루종일 추운날씨로 인해 고생을 했다.

 

#하얀 차돌 꽃이 피었다
한중리 도계에서 능선을 타는 것으로 산행은 시작됐다. 한중1리 마을 뒷산인 굴봉산(해발 500m)을 오르는데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급경사를 이뤘다. 추위에 대비해 옷을 단단히 챙겨 입었지만 한번 찬바람이 스며든 몸은 좀처럼 덥혀지지 않았다. 찬바람을 그대로 맞은 얼굴은 빨갛게 얼었다. 몸도 풀지 않은 채 급경사를 기어오르려니 몸이 둔하긴 했지만 거추장스런 겉옷도 벗을 수가 없었다.

굴봉산을 오르면서 첫 번째 눈에 띈 것이 바로 맹맥이(귀제비) 바위다. 바위 모양이 맹맥이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안쪽은 아늑해 갑작스럽게 비를 만날 경우 잘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맥이 바위를 지나니 다듬지 않은 원석의 차돌(석영)이 즐비했다. 차돌을 캐는 광산도 있었던 모양이다. 경제성이 떨어진 탓인지 중간에 폐광하고 원상복구를 한 흔적도 발견됐다.

김기식 전 등반대장은 "1차 군계 종주 때는 차돌을 운반할 때 쓰였던 것 같은 짐수레도 있었는데 없는 것을 보니 고물로 누가 가져갔나 보다"라고 말했다.

윤태억 한중리 이장으로 부터 "1990년 경 동네에 차돌을 캐는 광산이 있었는데 한 3년간 광산을 운영하다 중단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윤태억 이장은 소여리로 향하면서 나오는 첫 고개를 차돌이 많아 "차돌백이재"라고 부른다는 것도 덧붙여 설명해줬다. 한중리와 경북 중눌과, 마로 소여리와 통하는 고개다.

능선에 대해 설명해 주는 이가 없으니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보고 느낀 후 다시 지명지를 참고하고 또 마을의 이장님이나 노인회장님께 전화로 지역의 상황을 설명하고 확인을 하곤 하는데 산행 전에 지역에 대해 공부를 하고 산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 꼭 사랑의 열매와 같은 망개나무 열매다. 벌거벗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열매가 예뻤다

 

#사랑의 열매는 망개나무 열매?
한중권역을 지나 경북과 도계인 소여1리로 향하면서 또 하나의 재를 만난다. 경북 중눌 재지골로 가는 굴봉재이다. 교통이 불편한 옛날에는 목적지까지 가는 빠른 길을 찾다보니 험한 산도 중간을 타고 넘게 된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육지 속의 섬이 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고개라는 통로를 통해 양 지역이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소여리를 지나면서 멧돼지들의 놀이터도 만났다.

참나무에 얼마나 비벼댔는지 껍질이 다 벗겨졌다. 멧돼지의 파워가 놀라울 뿐이다.
가는 동안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망개나무 열매도 볼 수 있었다. 빨갛고 동그란 것이 사랑의 열매 같았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거나 이웃돕기 성금 모금 홍보를 할 때 나오는 빨간 열매 세 개. 정말 망개나무 열매 같지 않나?

망개나무는 지금과 같은 철 대문이 없을 때 사립문에 많이 사용했던 재료다. 잎이 파랗게 달려있는 망개나무를 엮어서 사립문(삽짝이라고 불렀다)을 해달았던 것이 기억났다. 일행 모두 같은 추억을 떠올렸다. 같은 추억, 같은 문화를 누렸다는 것이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지는지 세대공감 이라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 사진 양족의 세로로 나있는 바위를 바로 속곳바위라 부른다.

 

#속곳바위 지나 산행을 접다
소여 구간은 매우 길었다. 한참을 걸어서 소여구간과 물려있는 임곡리에 닿았다.  좁은 도랑을 사이에 두고 경북과 충북으로 나뉜 임실 우복동이다. 마을의 형상이 누워있는 소의 배 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천재지변에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어 과거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속리산면 구병리를 우복동이라고도 한다.

장창수(77)노인회장에 따르면 과거 임실은 강씨, 장씨, 김씨 3성이 살았는데 김씨는 거의 떠나고 현재 강씨와 장씨가 주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행정구역을 경북과 충북으로 나눈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한마을 한집안으로 이뤄져 화목하게 살고 있고 또 경북 임곡의 생활권이 마로관기, 보은인데다 보은에서 시내버스도 2번 들어와 행정구역만 다를 뿐 보은군민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임곡리를 보면서 마을의 경계구분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과거 임곡리에서 적암리를 가기 위해 넘었던 말목재로 향했다. 말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말목재 위쪽에 있는 속곳바위(치마바위)쪽으로 하산했다.

7, 80도에 이르는 급경사로 돌무더기 위에 낙엽이 쌓여있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미끄러웠던 치마바위 산을 가까스로 타고 내려와 적암천 건너 국도 25호선 마로면 적암리 도계에 닿으면서 둘레산행을 마무리했다.

치마처럼 생기지도 않았는데 치마바위라는 이름의 치마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장현광선생이 1595년 보은현감으로 부임해 청빈하게 생활하며 관직생활을 하다 고향인 경북 칠곡의 인동으로 갈 때 보은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섭섭해 하며 비단속곳을 선물로 줬다는 아내의 말에 남에게 폐를 끼쳤다며 애석해 하자 아내가 보은사람들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로 속곳을 벗어 바위 위에 두고 갔다고 한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이 바위를 치마바위, 속곳바위로 불렀으며 선생의 덕행을 비에 새겨 기리고 있는데 현재 보은고등학교 정문 옆 길가에 세워져 있는 비가 바로 장현광 선생의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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