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읍 죽전리 솜공장 허 만 경 대표
보은읍 죽전리 솜공장 허 만 경 대표
  • 류영우 기자
  • 승인 2010.12.09 09:14
  • 호수 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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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솜 줄게, 새 솜 다오" 솜과 함께 한 30년 세월

찬바람에 얼굴이 시리고, 손발이 꽁꽁 어는 초겨울 날씨가 이어지더니, 끝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동네 골목길은 지금처럼 깨끗하게 포장이 된 곳이 아니었다. 진흙길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울퉁불퉁해졌고, 발걸음에 얼어있던 작은 돌멩이를 차게 되면 어찌나 발이 아프던지.

아파트가 보편화되었고, 단열이 잘 된 집에서 생활하는 요즘에는 웃풍이란 것을 찾아 볼 수 없지만, 80년대만 해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겨울철이면 방안에서도 두꺼운 솜이불을 껴안고 내복을 입고 생활했다.

어느 가정이나 솜이불 몇 채씩을 장롱에 보관하였다가 겨울이 되면 그 진가를 발휘했던 때가 있었다.
웃풍이 심한 방안에 열기를 빼앗기지 않도록 두툼한 솜이불을 아랫목에 깔아두고서 냉기를 차단하기도 했고, 밖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돌아오면 아랫목을 내어주면서 몸을 녹이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혼례를 앞둔 규수집 혼수품 중에는 목화솜으로 만든 이불이 들어 있었다. 누나들이 결혼을 앞두면 솜틀집에서 틀어온 목화솜으로 예단집에서 이불을 맡기거나 집에서 손수 어머니가 이불을 만들어 주셨다.

가장 좋은 목화솜으로 만들어진 혼수품 이불은 신랑신부가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만큼 솜이불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은읍 죽전리 항건천 제방 아래에 '솜공장'이란 솜틀집이 있다.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곳으로 전락한, 그 귀한 솜틀집이 우리 고장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주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소중한 공간을 지켜가고 있는 사람은 올해 83살의 허만경씨다.

 

◆줄을 섰던 솜공장
허만경씨가 솜공장을 시작 한 것은 1984년이다.
나무를 때고, 연탄으로 난방을 해결하던 그 시절, 솜공장은 큰 성황을 이뤘다.
조그맣게 농사를 짓다 사고를 당해 한 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렵게 시작한 솜공장이었지만, 그에게 솜공장은 큰 복덩이였다.

솜공장을 인수하며 얻은 빛도 얼마 되지 않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군내는 물론 경북 화령에서도 와서 보은 솜공장은 장날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침일찍 와도 저녁이 되어서야 솜을 탈 수 있었고, 탈 순서를 기다리는 솜들이 가게 한쪽에 수북히 쌓였을 정도였다.

"밤낮으로 기계를 돌릴 정도였어. 거기에 80년대 물난리가 나면서 물에 젖은 솜들을 말리고, 재생하려는 사람들로 눈코뜰새가 없었어."
오랜시간, 솜과 생활해서인지 그의 솜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

특히 요즘처럼 피부질환에 고생하는 현대인들에게는 화학솜보다는 자연에서 나온 천연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일단 정전기가 나지 않고, 정전기가 나지 않으니 그만큼 피부에 자극이 없다는 거 아니겠어? 솜이불은 무겁다고들 하는데 다져져서 그렇지 얇게 만들어도 얼마나 따뜻한데."

 

◆이제는 벗이 된 솜틀기계
솜과 함께 그에게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벗이 있다. 바로 30년 가까이 그와 함께 솜을 다듬어 온 솜틀기계다.
여러 번 주인이 거쳐 갔지만 10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움직여 온 솜틀은 허만경씨에게 있어 이제는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벗이다.

"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기계지. 경유를 사용한 발동기로 움직였는데, 15년 전 발동기가 고장난 후 전기로 바꾸었지."
동력만 바뀌었을 뿐 솜을 다듬는 손길은 100년 전 그대로다.

오랜 시간, 속 한 번 끓인 적 없이 손발을 맞춰 온 솜틀에 대한 애정때문일까? 그는 솜틀기계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희망하고 있었다.

"솜을 타러 오는 사람들이 항상 얘기하는 것이 '제발 이 기계는 없애지 말아달라'는 거야. 오랫동안 함께 해 왔는데, 고물로 팔아버리기에는 아깝고, 그렇다고 내가 언제까지 솜공장을 운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솜공장은 항상 열어 놓겠지만, 그 후에는 문화재로 지정돼 박물관에 전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지."

솜을 타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1kg에 3천원 정도다.
한 달을 운영해 봐야 10만원을 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허만경씨가 항상 솜공장의 문을 열어 놓는 이유는 한 가지다.
30년을 함께 한 벗과 좀 더 있고 싶어서.
솜공장을 나서자 잔뜩 흐려있던 하늘에서 솜털같은 하얀 눈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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