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복천암 수암화상탑&학조등곡화상탑
⑫복천암 수암화상탑&학조등곡화상탑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8.12.20 00:54
  • 호수 4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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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사이로 문장대 보이는 길지에 위치
▲ 복천암에 있는 수암화상탑(사진 앞쪽)과 학조등곡화상탑의 모습이다.

법주사의 암자인 복천암엔 보물 1416호인 수암화상탑과 1418호인 학조등곡화상탑이 있다.

복천암 화장실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데 부도탑의 주인공인 수암화상은 신미대사이며 옆에는 신미대사의 제자인 학조대사의 탑이 있다. 부도탑은 무명탑이 많은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두 승탑은 다른 부도탑과 달리 기단부에 이름 적혀 있고 제작연도까지 적혀있어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수암화상탑은 '수암화상탑, 성화 16년 9월 입(입적)' 이라고 쓰여 있다. 성화는 성종 16년 1480년을 말한다. 그 옆 학조화상탑은 '학조등곡화상탑, 정덕 9년 감술 5월일 립'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중종 9년 1514년을 말한다.

신미는 세종대에 등장해 세조대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세종이 불교에 심취했던 시기인 세종말년에는 '판선교종직'이라는 승직을 받고, 수륙제를 주관했다고 한다. 문종대에는 선교양종을 통솔하는 직위까지 오르고 세조대에는 불경 간경사업을 주도했다. 제자 학조도 스승 신미대사를 도와 불경의 한글번안 및 출판에 힘썼다. 학조대사는 또 금강산 유점사 중창, 봉선사, 직지사 등을 거쳐, 성종대에는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는 등 여러 사찰에 관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연산군대에는 고려대장경 3부를 엮어 발문을 쓰기도 했다.

이들이 복천암에 묻힌 이유는 무엇일가? 야사(野史)에는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난 후에 꿈에 나타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뱉은 침으로 인해 피부병에 걸렸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복천암 물로 씻으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세조가 복천암으로 행차하고 복천암에서 법회를 연 신미와 학조의 법력 때문인지 세조의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조와 피부병은 속리산 내 계곡의 목욕소에서 씻고 나았다는 설도 전해지는 등 세조와 피부병 속리산과의 상관관계는 깊다. 피부병이 나은 세조는 그 고마움으로 법주사에 많은 땅을 하사했다고 한다. 때문에 구 집단시설지구가 사내리(寺內里) 혹은 사하촌(寺下村)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그것이고 은구모퉁이라는 지명도 땅 하사와 연유가 있다.

신미와 학조의 승탑 모양은 원구형, 원당형으로 탑신이 구슬모양이고 굉장히 단조롭다. 국사까지는 오르지 못했어도 한 시대를 구가한 승려치고는 승탑이 화려하지 않다. 팔각원당 형에서 계승된 팔각의 기단부에는 연화도 없이 덩그러니 탑신을 얹어놓았다.

이들의 승탑이 비교적 단조롭게 제작된 이유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충주 청룡사지의 보각국사탑은 억불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않던 태조 때의 승탑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화려하다. 그러나 신미와 학조는 각각 성종과 중종 때 입적한 인물이다. 성종 대에는 억불이 강하게 시행되던 때였고 연산군은 조선 땅에서 승려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려던 왕이다. 비록 신미와 학조가 대단한 고승이라고는 하나 억불정책이성행하던 때여서 화려한 승탑을 건립하기에는 무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암화상탑과 학조등곡화상탑이 자리한 위치는 소나무 숲 사이로 멀리 문장대가 보인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꼽는다. 탑은 화려 대신 단순을 선택하면서 풍수로 보상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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