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김장
  • 편집부
  • 승인 2018.11.29 09:48
  • 호수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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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철

세월이 참 빠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덥다. 덥다'했는데 이제는 '춥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하기야 11월 말이니 추울 때도 되었다. 지인 중 한 분이 업무 차 러시아를 방문했다며 순백의 산하 모습을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경치의 아름다움보다는 옛 추억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쯤이면 소심한 아내에게 걱정거리 하나가 더 생긴다. 바로 김장이다. 고추야 일찌감치 사다가 놓아서 대행이지만 다양한 양념거리를 사서 다듬는 일이며, 배추를 절이고 씻는 일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런 아내의 걱정을 입 서비스로 덜어 줄 양으로 '시장에서 사다 먹자'고 하면 펄쩍 뛴다. 반년 양식을 어떻게 사다 먹느냐며 오히려 화를 낸다.

작년부터 김장은 아내와 나의 몫이 되었다. 전에는 아내의 교회 친구들이 와서 같이 했기에 큰 걱정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슬며시 나의 몫이 된 것이다. 언젠가 그 이유를 아내에게 묻자, 모두들 바빠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했다. 하기야 집안일만 하는 전업주부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벌써 40여 년이 지났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김장은 둘째 형수와 내 몫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님 댁에서 김장을 하고 조금씩 같다가 먹어도 되었을 텐데 무슨 연유로 따로따로 김장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어째 되었든 지금 생각나는 것은 추운 겨울 우물가에서 배추를 절이고 무를 닦던 일이며, 어느 해인가는 김장을 끝내고 형수와 함께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재래식 부엌에서 배추 전을 부쳐 먹던 일도 아련히 떠오른다.

아내의 발걸음이 점점 빠르게 움직이던 어느 날 아침. 나에게 날짜 몇 개를 던져주고는 가장 한가한 날을 고르란다. 그 날이 김장을 하는 날이니 준비 단단히 하라는 의사표시인지도 모른다. 김장 날짜를 정하자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지인에게 절인배추와 무를 예약하며 꼼꼼하게 김장 일정표를 점검한다.

김장하는 날 아내는 새벽부터 부산하다. 나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다양한 양념을 절구로 빻기도 하고, 믹서기로 갈아서는 양념 통에 가득 담아 놓았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일전에 예약한 농가로 달려가 절인 배추와 무를 싣고 와서 김장을 하는데 생각보다 배추 포기가 작아 일하기는 좀 수월했다.

초보와 전문가는 무엇이 달라도 달랐다. 나는 옷마다 고춧가루며 양념이 지천인데 반해 아내의 옷은 처음 그대로다. 그뿐이 아니다 내 딴에 열심히 구석구석 배추 속을 넣은 것 같은데 완성된 배추김치를 아내 것과 비교해보면 뭔가는 덜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아내는 이 정도면 잘한 것이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점심때가 되자 아내는 언제 준비했는지 수육을 삶고 동태 탕을 끓여 방금 만든 김치와 함께 내놓았다. 김장 때마다 먹는 수육이지만 올해 먹는 수육이 특별히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막 담근 김장김치의 맛과 아내의 사랑이 어우러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내는 미리 준비한 비닐봉지에 김치 몇 포기씩을 싸서는 커다란 대야에 별도로 챙겼다. 나는 그 이유를 알기에 말없이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뒷정리를 마친 후 아내와 나는 커피 한잔으로 피로를 녹였다. 아내의 얼굴에는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져서 그런지 참 평안해 보였다. 잠시 후 아내는 옷을 갈아입고는 대야를 갖고 밖으로 나갔다. "김장김치예요. 한번 드셔 보시라고 조금 가지고 왔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독거노인이 사시는 어두운 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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