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길과 폐기물처리장
세조길과 폐기물처리장
  • 편집부
  • 승인 2018.09.06 08:38
  • 호수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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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황균

그 뜨겁던 폭염의 여름도 가고 19호 태풍 '솔릭'도 게릴라 폭우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점잖게 지나갔다. 이제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한다. 비에 씻긴 청청한 나무들과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의 우렁찬 소리를 들을 겸 법주사 옆으로 난 세조길을 찾았다. 사내리 용머리폭포 근처에 차를 세우고 식당 뒤편 길로 해서 야영장을 지나 법주사 입구까지 난 오리숲길을 걷는다. 숲 속 곳곳에 '우드볼'을 치는 분들이 많이 늘었다. 전국에서 동호인들이 몰려올 정도로 멋진 숲속 우드볼 코스로 이름이 났단다. 법주사 입구부터 세심정까지가 세조길이다. 조선왕조 제7대 임금인 세조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문종이 죽자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던 수양대군이 바로 세조다. 세조가 지병인 피부병을 고칠 겸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신미대사를 만나러 복천암을 방문하였던 그 코스에 최근에 새로 만든 세조길! 국사로 바쁜 와중에도 세 차례나 보은 속리산을 찾았다고 하니 세조와 보은은 인연이 참 깊다. 특히 세조 즉위 10년 (1464년)의 행차는 21일 초정, 23일 청주, 26일 회인현에 도착하여 양로연을 베풀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공식 기록이 있다. [참조] 세조의 청주 행차 [世祖-淸州行次]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때 정이품송도 벼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법주사 매표소를 지나 예스러운 대문을 통과하여 세조길로 접어드니 수 백 년 이곳을 든든하게 지켜온 낙락장송들이 어서 오라고 반긴다. 호숫가 옆으로 난 오솔길은 몇 번을 오더라도 지루함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고 걷기 편하다. 자연 훼손을 우려하여 2Km가 족히 넘는 거리를 목재를 써서 통행로를 만들어 더욱 걷기 편하다. 계곡을 돌아 돌아 세조가 몸을 담갔다는 목욕소를 지나 세심정에 이르는 길은 유난히도 솔 향이 코를 자극하여 상쾌하기 그지없다. 세심정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내려오든, 아니면 세심정을 지나 복천암까지 가든, 내쳐 할딱고개까지 다녀오든 내 맘이다. 이제까지 내가 다녀본 그 어느 트래킹 코스보다 빼어난 코스다. 게다가 자신의 권력욕과 주변 간신배들의 감언이설로 수많은 충신들을 도륙하고 왕위를 찬탈한 그가 부처님 앞에서 지난 일을 후회하면서 권력의 덧없음을 한탄했다는 스토리가 있어 더욱 의미가 남다른 길이다.

보은은 그런 곳이다. 속리산을 비롯한 백두대간의 준령들이 등줄기를 이루어 꿈틀거리는 대자연이 있고 대대로 사람이 살아온 곳이다. 골짜기마다 마을마다 유적과 전설과 이야기가 스며있는 천혜의 고장이 보은이다. 그러나 복천암을 돌아 다시 사내리 용머리폭포 아래에 서고 보니 무거워지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보은의 여러 곳에서 청정보은을 폐기물 처리장으로 오염시키려는 시도들이 횡행하고 있는 현실이 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법주리에 산다. 법주리에 유기성폐기물처리장을 지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끈질기기 짝이 없다. 문득 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묄러의 글 '처음 그들이 왔다'가 생각난다.

맨 처음 나치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 나치정부는 사회 민주주의자를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 나치정부는 노동조합원을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나치정부는 유태인들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나치정부는 나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온갖 폐기물이 보은의 이 곳 저 곳에 쳐들어올 때 나는 모른 척 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므로. 남의 동네일이므로. 내 눈 코앞에서 침출수가 흐르고 악취가 나지 않으므로. 허나 이제 나의 동네 우리 앞에 합법을 가장한 쓰레기처리장이 들어온다고 하니 함께 나서줄 사람도 없고 같이 싸우자고 소리 지를 염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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