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레바퀴는 보은 땅을 구른다 ①
역사의 수레바퀴는 보은 땅을 구른다 ①
  • 편집부
  • 승인 2018.08.29 19:22
  • 호수 4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주용(보은어암, 글·그림 작가)
보은읍 어암리 출신 글·그림 작가인 이주용 작가가 임진왜란 당시 수리티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보은현감이자 의병장 조헌 선생의 의로운 삶과 보은이 동학의 고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을 '역사의 수레바퀴는 보은 땅을 구른다' 라는 글에 풀어냈다. 본보는 4회에 걸쳐 이주용 작가의 글을 게재할 계획이다. (편집자 주)

2018년, 올 여름의 폭염은 정말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극심하다. 이 전의 역사적인 더위로 사람들은 1994년의 여름을 꼽는다. 필자도 그 해 여름을 견디고 나서 '아, 94년 여름 더위는 정말 특별했어.' 하고 마음 속에 기록해 두었더랬다.

1994년! 그 해는 우리 보은사람들에게 더위보다 더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진 한 해였다.

이 해 4월 20일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는 3년간에 걸쳐 '보은 북실전투'로 요약되는 발굴, 조사, 연구에 대한 결과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보은읍 북실 일대의 산야에서 동학농민혁명전쟁의 최후의 전투가 있었고 그 때 산화한 동학농민혁명군의 유골 3천여 구가 여태껏 이 땅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91년 한 농부가 땅을 파다 유골을 발견, 신고했고 이후 충북대의 결과보고서에 따라 역사의 새 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열고 언론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으며 결국 보은 성족리 땅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세워졌다. 보은 땅에 역사의 새 장이 펼쳐진 것이다.

보고서가 발표된 1994년은 꼭 100년 전 이 땅에서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전쟁의 시점과도 맞아 떨어졌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보은 땅에 깊은 자국을 내고 굴러간 것이다.

1894년! 그 전 해인 1893년 보은 땅에서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있어났다. 바로 보은 장안집회가 있었던 것이다. 무려 2만 3천여명 이상의 군대도 아닌 엄청난 인파가 보은의 장안 땅에 모여들었다. 곳곳에 '척왜양창의', '보국안민', '광제창생' 등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들은 대부분 동학교도로서 그 이전부터 조정에 요구해 오던 교조신원을 넘어선 새로운 결의를 담은 내용의 깃발을 내세운 것이었다.

'척왜양(斥倭洋)',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우세한 무기를 앞세워 강화도 조약을 거쳐 온갖 횡포를 부리며 우리나라에 파고들어온 일본과 서양세력들을 내몰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창의(倡義)', 나라안팎의 무도하고 불의한 세력들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고 떨쳐일어난 우리 모두는 의롭고 떳떳한 이 뜻을 펼치고자 한다.

'제폭구민(除暴救民)', 부패한 세도정치와 가렴주구를 일삼는 수령으로부터 백성을 구한다는 것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우리는 나라를 둘러엎고자 하는 반역도당이 아니다. 임금을 도와 올바른 정사가 시행되고 그리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해지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광제창생(廣濟蒼生)', 널리 세상을 구하고 만민이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보은 장안집회는 이러한 깃발들로 뒤덮인 평화롭고 희망에 부푼 만민공동회였다. 대규모의 인원이 평화롭게 모여 뜻을 펼치고 대화 끝에 평화롭게 해산한 사건이므로 엄청난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보은취회'인 것이다.

이후 정읍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전쟁이 전주, 공주를 거쳐 '북실전투'로 끝맺음으로서 보은 땅은 동학의 끝과 시작을 상징하는 땅이 되었다.

1892년,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이 보은 땅을 찾아 장안에 대도소를 설치한 때로부터 꼭 300년 전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 땅에 깊은 자국을 내며 굴러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 주 용 (보은어암, 글·그림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