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3년 만에 마을 이장까지
귀농 3년 만에 마을 이장까지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0.07.29 09:27
  • 호수 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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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량면 단월리 민대기씨

광주가 고향이고 귀농 전에 중견 제과업계 영업소장까지 지낸 민대기(51)씨는 쌀이 쌀 나무에서 나오는 줄 알고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도시민으로 광주 중심지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던 직장생활을 과감히 접고 인생의 전환점으로 귀농을 결심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었다. 40대 후반 자녀 교육 때문에도 농촌에서 도시로 나가는데 거꾸로 시골로 들어오려고 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 법도 했던 그의 아내 또한 허락하고 인생 2막을 펼칠 것에 대해 고민했다.

그들은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국민 소득이 높을수록 꽃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했고 선호도가 높은 장미가 좋겠다고 판단했다. 광주 근교에 있는 장미농장을 견학하면서 생화 수입이 어려운 장미는 생명력이 길고 또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고 민대기씨는 다른 꽃은 제쳐두고 장미에 대한 시장조사만 했다.

그리고 귀농자 지원 시스템이 잘 돼 있는 광주에서 멀지 않은 강진 땅에 자신의 뼈를 묻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2007년 1월 귀농했다.
처음 갖고 있는 돈과 강진군의 지원으로 장미 하우스 800평을 샀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모두 담긴 장미 하우스는 꿈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귀농 첫해에 화재를 당했다.  죽기 살기로 재기에 나섰고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장미 농사의 성공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미농사에만 파묻혀 1년을 보내고 있는 민대기씨에게 주민들은 올해 마을 이장을 맡겼다.
이제 겨우 장미에 대해서만 조금 알 뿐인데 어떻게 이장을 볼 수 있느냐고 정중히 거절했지만 주민들은 마을에서 가장 젊은 민대기씨를 앞에 세워놓고 만장일치 이장을 맡겨 버렸다.

처음에는 저놈이 얼마나 버틸까 냉소적으로 대하고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냉담한 반응을 보여 적응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3년 전을 생각하면 언감생심의 일이지만 막걸리를 사들고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에게 대접하고 마을에 행사가 있으면 아내가 음식을 만들어 주민과 함께 하는 등 지역민과 융화하는데 노력한 결과 자연스럽게 마을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제 귀농 3년차인 민대기씨는 "둘이 열심히 해도 농업 소득에는 한계가 있다. 귀농을 해서 3년 정도 착실히 했다"며 "귀농 지원부서에서도 추가 지원, 가능성 있는 것을 찾아보고 귀농인이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지원하면 귀농인들도 보다 발전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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