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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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부
  • 승인 2018.06.27 23:15
  • 호수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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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철(아동문학가)

나이가 들수록 주변의 일을 하나둘 내려놓는 것이 순리인데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가끔 동동걸음치다가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를 반문해 보면 답은 간단하다. 남이 부탁을 하면 쉽게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 그렇다. '오죽하면 나에게까지 그런 부탁을 할까?' 또는 '나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주어야지.'라는 생각이 늘 앞선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문학모임에 들어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회원들 얼굴을 익힐 정도인데 총무를 맡아 달란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아도 이것은 아닌 것 같아 정중히 사양 했다. 그러나 회장은 막무가내다. "류 시인도 느끼시겠지만 문학모임에 일할 만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류 시인의 경력을 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며 회장은 간곡한 부탁을 한다. 그래서 결국 마음 약한 내가 지고 말았지만, 이 역시 나를 번잡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이 되었다.

한 달 전쯤이다. 문학 모임에서 오랫동안 회장 직에 있던 김 시인께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은 연로하여 문학모임에 거의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몇몇 회원들은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여 조촐한 출간기념식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문제는 그분이 사시는 수원으로 갈 차편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꽃바구니며 선물을 갖고 이동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는 총무로서 내 승용차로 이동하기로 하고 회원들에게 알리자 모두 기뻐했다.

수원 시내에 들어서자 길이 막혀 잠시 고생은 했지만, 거의 시간을 맞추어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 딱 한 번 김 시인을 보았는데도 내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옛 지인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 분이 사는 곳은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실버타운이었다. 아파트 형태로 되어 있어 노인들이 생활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주위를 둘러 본 우리는 청결한 환경과 직원들의 친절함으로 인해 그동안에 갖고 있던 실버타운의 부정적인 선입견을 모두 불식시켰다. 그분은 여기서도 많은 선한 일을 하고 있어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관장이 직접 나와 우리를 안내해 주었고, 우리는 회의실에서 기념식과 함께 시낭송회를 가졌다.

시낭송회가 끝나자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방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생활하기에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자그마한 침실, 그림이나 글을 쓰기 위한 커다란 탁자, 그리고 간단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주방 등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돌아가신 남편의 사진과 함께 주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좀 생뚱맞은 물건이라고 생각하며 주판이 왜 거기에 걸려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잠시 회상에 잠긴 듯 밖을 쳐다보다가 김 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 주판은 남편이 은행원으로서 평생 사용하던 물건입니다. 남편은 계산기가 나왔을 때도 저 주판만을 고집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남편의 주판이 계산기보다 더 빨랐습니다. 저는 남편의 분신 중의 하나인 저 주판을 만지며 날마다 남편과 이야기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까지도…."

김 시인의 귀에는 지금도 남편의 주판알 소리가 들리는지 잠시 눈을 감는다. "아, 그랬구나. 날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시를 한 수 한 수 썼구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 뒤편에서 회원 한 분이 읽어주는 시가 우리를 평온하게 해준다. '딸가닥 딸가닥' 거리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주판알 소리와 차창 밖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붉은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저녁이다.

류영철(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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