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주.. 제주여... 목메이는 그 이름, 4.3이여
제주. 제주.. 제주여... 목메이는 그 이름, 4.3이여
  • 편집부
  • 승인 2018.04.12 17:07
  • 호수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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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산외면 탁주리)

제주 4‧3사건은 해방이후 현재까지 6‧25전쟁을 제외하고는 단일사건으로서는 국가에 의한 최대의 양민학살사건에 해당됩니다.

1947년 3‧1절 행사에서 경찰의 오발로 인한 민간인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제주 4‧3사건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행되지 않자 제주도 기관과 직장의 97%가 참여한 총파업 투쟁으로 확대됩니다. 이에 미군정청은 육지에서 증원된 경찰조직과 경비대 그리고 악명 높은 우익청년무장대(서북청년단)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합니다. 이는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350여명의 남로당 무장봉기로 이어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정은 미군 함정과 증원된 경비대를 동원한 토벌작전을 감행합니다. 1948년 8월 이승만 정부 수립 후 군대를 동원한 초토화작전의 결과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으면서 1949년 6월 사실상 종결됩니다.

1940년대 당시 제주도 인구는 약 30만명이었는데 제주4‧3사건의 결과 사망자만 총인구의 1/8(한국정부 추산 2만7천여명) 또는 최근의 미정부 자료에 따르면 총인구의 1/5인 6만여명(1949년 당시 제주지사가 미정보부에 제출)으로 추산됩니다. 여기에 더해 4만 여명의 제주도민은 당시 4‧3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피난간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중산간마을 (표고 200m~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마을) 97%가 사라졌으며 가옥 3만9천200여동이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남녀노소를 비롯한 비무장 일반 양민이었으며 군대와 경찰, 서북청년단에 의한 진압과정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무자비하였습니다. 미군정청이 주도하고 시작하여 이승만 정부가 실행 완료한 사건입니다.

당시 작전계획처럼 제주도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극적 사태가 가능했던 이유는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승전국이 된 미국은 패전국 일본으로부터 한반도 남쪽을 인수받는 형태로 남한에 주둔하여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을 실시합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힘을 겨룰 수 있는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동아시아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방어기지로서만 한반도 남쪽은 의미가 있었지 우리 민족의 염원인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이 행한 첫 작업이 일본을 위해 복무한 부역자(친일파)들을 일본인이 차지했던 자리까지 부여하며 다시 복귀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찰조직과 군사조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정부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동포들의 피땀어린 독립자금으로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우리나라(남한)가 미국의 한주가 되기를 소망했던 인물로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최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인수한 막대한 적산(일제강점기동안 일본이 우리민족으로부터 강탈하거나 수탈한 모든 물적 자산)을 이승만과 다시 복직한 친일파와 소수 지주세력들에게 몰아주어 그들의 권력기반을 형성하게 합니다.

하지만 35년간 식민지에서 억압받고 수탈당하던 우리 민족 대다수는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과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파업과 항쟁을 해보지만 이 모든 민족적 저항은 소련을 떠받드는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규정되고 치부되어져 미군정의 강력한 군사력이 동원된 친일 경찰조직과 경비대,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진압됩니다.

해방후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었던 동포 6만여명이 일시에 귀국한 제주도는 반일감정과 민족독립에 대한 의식이 그 어느 지역보다 강했습니다. 귀국한 고향에 친일파 경찰이 다시 득세하고 오히려 일제 강점기보다 더욱 활개치는 모습은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결코 양립할 수 없었던 세력, 자주 독립 국가를 열망했던 대다수 민족세력과 일제가 패망하자 미국에 빌붙어 권력과 영화를 다시 꿈꾸던 친일파 세력은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을 탄생시켰습니다.

1950년 6‧25전쟁을 통해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4‧3사건을 소수 공산당세력의 폭동사건으로 축소, 왜곡하여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거짓을 이야기 하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던 국가권력의 잘못된 모습은 30년 후 전두환 장군의 불법적 정권 창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명의 시민을 총칼로 학살한 1980년 광주항쟁의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제주4‧3사건은 잘못된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맺힌 통곡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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