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9주년에 즈음하여
3.1운동 99주년에 즈음하여
  • 편집부
  • 승인 2018.02.22 12:40
  • 호수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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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태 재

평창.강릉에서 벌어지는 얼음판 눈밭 위 곡예를 보다보니 2월이 다가고 곧 3월입니다. 99주년 3.1절을 맞습니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기해 전국적으로 기념사업을 꾸린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그렇습니다. 100주년을 예년처럼 맞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6월에 있을 지방선거가 아무리 다급하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쩐 연유인지 보은지역에는 3.1운동 나아가 항일관련 현충시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학농민전쟁, 6.25 한국전쟁, 월남파병 관련 그리고 무공수훈자 전공비 등은 쉽게 볼 수 있는데 말입니다. 광복 후 친일파가 득세한 탓일까요.

필자는 지난 2009~2010년 충북출신 3.1민족대표 여섯 분 중 변절한 친일파 정춘수의 동상이 끌려 내려진 청주 삼일공원 정비위원장의 소임을 맡아 일했던 터라 충북지역의 3·1운동 역사와 유적지에 대해 고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박걸순 충북대교수 등의 연구를 토대로 살펴보면, 충북의 3.1운동은 늦게 시작한 반면 가장 격렬하고 끈질기게 전개됐으며, 특이하게도 횃불이나 봉화 등 야간에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9일의 괴산 장날 시위를 필두로 4월 19일의 제천 송학시위까지 만 1개월 동안 당시 도내 10개 군 중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50여회 이상 만세시위가 벌어져 경찰관서 13, 헌병대 5, 군청과 면사무소 7, 우편소 1개소 등 26개소를 습격 파괴 방화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시위양상이 격렬하였기 때문에 평안도와 경기도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던 것이죠.

보은에서는 4월 초에 들며 인근의 옥천과 영동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자 보은에서도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대전으로부터 장교 이하 16명을 파견하여 삼엄한 감시를 하였습니다(朝特報十號, 1919. 4. 16, '騷擾事件に關する狀況'). 그러나 보은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4월 8일 보은 소재지에서 100여명이 시위를 벌였고, 11일에는 산외면 구티리에서 100여명이 종을 울리며 만세운동을 시작하다가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해 해산 당하였습니다(騷密第四三號, 1919. 4. 15,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四十八報)'). 또 12일 밤에는 수한면 무서리(아마도 묘서리의 오기인 듯)에서 주민 100여명이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만세운동을 벌였고, 13일 밤 11시에는 삼승면 선곡리 주민 30여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騷密第三四三號, 1919. 4. 17,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五十報)')는 기록이 있습니다.

보은군지(1994)를 보면(p.283~284)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4월 3일에 산외면 이식리와 내북면 서지리, 산성리 시위를 시작으로 8일에는 다시 내북면 서지리에서 구열조가 중심이 되어 김성복, 김수려 등 10여 명이 뜻을 모았고, 윤정훈, 윤홍훈 등 8명이 시위를, 산성리에서는 이용기 등 20여명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11일 탄부면에서는 이창선을 중심으로 이인하, 김용섭, 이준영이 뜻을 같이하여 마을주민 수십명이 구인리, 길상리 뒷산에서 기세를 올렸으며, 12일에는 수한면 최용문, 안만순, 송덕빈 3인이 주도하여 주민 60여명이 묘서리 농암산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삼승면에서는 13일 밤 11시경 30여명이 선곡리에서 만세시위를 하였습니다. 보은의 3.1운동은 윤정훈이 서울에 올라가 천도교주 손병희와 만나고 돌아와 위에 열거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지역사회의 3.1운동 나아가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취약해 보입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보은 등 몇몇 시군에는 기념탑비 하나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부진하다 보니 유적지에 대한 고증과 정비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의병 전투지나 3.1 만세운동의 시위 현장, 일본 경찰과 헌병의 주재소와 분견소, 신간회 지회 장소, 학생운동의 현장, 독립운동가의 생가 및 관련 유적지 등을 정밀조사를 통하여 고증하는 작업은 마음먹기에 따라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인된 유적지에는 정비 또는 복원과 함께 최소한 표지물과 설명문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향토사 교육교재 등을 개발하여 독립운동 유적지를 현장학습장으로 활용해야지요.

내년이면 3.1항쟁 발발 100주년입니다. 한 세기가 흘렀습니다. 이제라도 서둘러 다양한 계기 사업을 추진하여 그 의미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유적지를 고증 확정하고 기념 시설을 건립하여 역사교육의 현장 학습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또 3.1운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독립운동사와 보은출신 독립운동가의 발굴 및 재조명 등 학술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보은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위상을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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