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면 달산리 출신으로 대구에 거주하는 이상익(80)씨가 대구 도심재생문화재단이 주관한 대구 중구 생애사 열전 100인에 선정돼 생애사 자서전을 펴냈다. 생애사는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보관된다고 한다.
대구 중구 생애사 열전에 선정된 100인 중 99명은 모두 대구가 고향인 대구사람들이고 이상익씨만 대구가 아닌 보은군 출신이어서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94번째로 소개된 이상익씨의 자서전은 총 218페이지에 달한다. 유년기, 초등학생 시절, 그리고 마산으로 내려 중등과정을 보낸 이야기, 청년기를 지나 그곳에서 직업을 갖고 생활해 대구에서 성공한 인생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생애사는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나 8살 때 해방을 맞아 9살 때 고향 삼승면으로 돌아와 궁핍하게 살던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일본에서 살 때 아버지가 고향으로 돈을 보내 고국으로 돌아오면 비교적 편안하게 생활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고향에는 아버지가 보낸 돈의 흔적은 한 푼도 남지 않았고 오히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이상익씨는 삼승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됨)에 입학해 어렵게 공부를 마쳤으나 중학교 갈 형편이 안돼 인근 서당에서 한자공부를 하는 것으로 학구열을 대신해야 했다. 그러다 바로 위의 형이 취업해 있는 마산으로 내려가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18살 때 겨우 마산의 창신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마산공고에 입학해서도 학비는 스스로 벌 수 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이상익씨는 학교공부를 하는 낮 시간만 제외하고 새벽,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학업을 유지해 21살에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해인대학(현 경남대학)에 합격하고 대학 진학은 포기했지만 이상익씨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의지의 보은인의 모습을 보였다.
공군에 입대해 그곳에서 자동차 1종운전면허를 취득한 이상익씨는 제대 후에는 마산여객에 취업했고 이후 진해여객, 즉 지금의 버스회사에 취업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곳에서 전국 최초 안내원 없는 자율 시내버스 회사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1990년에는 대구로 이사해 대화운수를 거쳐 태일운수, 태일기업에서 상무, 전무이사까지 지내는 등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보낸 이상익씨는 재직 중 교통안전의 중요성을 간파하며 캠페인 등을 전개하고 전국 무사고 사례발표대회 등에 나가 수상하는 등 내부무장관상, 건설교통부장관상, 치안본부장상 등 다수의 수상을 했다.
운수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것이 경험이 돼 현재는 도로교통안전공단이 교통안전 교육지도사로 위촉해 노인대학과 사회복지관, 경로당 등에서 어르신 교통안전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평생교육으로 영남대학교 경영대학원, 경북대학교 명예대학을 수료하고 노인운동레크리에이션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해 웃음을 선사하는 등 틈만 나면 새로움에 도전하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책을 읽고, 유행가 따라 부르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 등 즐겁고 유쾌한 생활로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상익씨는 2010년 보은군수 공로패를 수상했으며, 2016년 대구보은향우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