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맞춤
눈맞춤
  • 편집부
  • 승인 2017.09.06 20:12
  • 호수 4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영철

입추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열대야가 사라졌다. 밤에는 아직 소리가 작지만 풀벌레 소리도 들린다. 아침을 먹고 있으려니 만삭인 딸이 아내를 급히 부른다. 잠시 후 "여보, 병원 갈 준비를 하세요. 손자가 나올 준비를 하나 봐요."하며 나를 채근한다. "어허, 고놈 시간관념이 정확하군. 오늘이 예정일이라고 하더니." 나는 황급히 출산용 가방을 들고는 차고로 내려갔다.

미리 전화를 해두어서 인지 병원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일사분란하게 딸아이를 안내한다. 잠시 후 간호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우리를 보고 환히 웃는다. "시간 잘 맞추어 오셨어요. 오늘 손자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혹시 사위 분께서 오실 수 있으시면 전화를 하세요."하며 우리가 준비해야 할 사항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두 시간이 지나자 사위가 도착했다. 그 동안 분만실에서 산모를 돌보던 아내는 사위를 보고 "들어가겠나."라고 묻자 "예"하고는 성큼성큼 들어간다. '이제는 어머니보다 남편이 더 편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본다. 아내와 나는 분만실 앞 대기소에서 산모의 순산을 위하여 잠시 기도하였다. 갑자기 웅성거려 주위를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보였다. 늦둥이 동생을 보는지 대학생 같은 딸이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고, 산모의 친정어머니, 시어머니로 보이는 분도 앉아 있었다. 분만실 문이 열릴 때마다 새 생명이 모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온다. "우리 손자는 어떤 모습일까? 아빠를 닮았을까? 엄마를 닮았을까?"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사위가 나온다. "조금 전에 애기를 순산했습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고요. 잠시 후 아이가 먼저 나온 후,  30분 정도 지나서 산모가 나올 것 같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한 여름 동안 아내를 돌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입이 귀에 걸린 사위는 우리를 향하여 공손히 인사를 한다.

"여보, 우리가 이제 진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구려. 축하합니다." "당신도 할아버지가 된 것을 축하드려요. 내가 어제 지혜를 낳은 것 같은데 벌써 커서 애 엄마가 되었네요." 아내는 잔뜩 상기되어 얼굴이 볼그레하다.

분만실 문이 열리며 손자가 나타났다. "사랑아(태명)! 그동안 고생했다. 네가 이 세상에 나 온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손자는 우리의 소리에 눈을 살짝 뜨더니 나와 잠시 눈맞춤을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반가와요. 저도 엄마 배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떤 분인가 궁금했어요. 아! 이 세상은 정말 눈부셔요.죹사랑이는 첫 소감을 말하고는 조그마한 입을 벌려 하품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입보다 눈이 더 많은 말을 하고 호소력도 강하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젖을 문 채 어머니를 바라보는 호수 같은 아기의 눈. 오해로 생긴 사랑싸움 끝에 만나 그윽한 눈으로 연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 어찌 수천마디의 말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보다는 눈맞춤을 하려고 노력한다. 만나는 사람과, 꽃 그리고 이름 모를 별들에게 까지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