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암에서
오성암에서
  • 편집부
  • 승인 2017.08.10 10:38
  • 호수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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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철

"그래, 절에서 내려간다고?" "예, 군대에 가려고요." "시험은?" "그만두려고요." "거참, 남자가 뜻을 세웠으면 끝을 보아야지. 몇 달 후면 시험인데 이제와 그만두다니, 그럴 거라면 진작 그만두지. 왜 그 고생을 했노." 요사채 마루에 앉아 스님과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법당 앞에 있는 오층석탑 꼭대기를 바라본다. 아까부터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자리를 못 잡고 앉았다 다시 일어나기를 몇 번째 하고 있다. 마치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전날 형님을 만났다. 봄에 나에게 하신 말씀은 있었으나 부탁을 하면 꼭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동생, 더는 힘들어. 우리 애들도 내년이면 고등학교, 중학교에 가야 해. 내 월급으로 더 이상 동생을 도울 수는 없어. 그래서 봄에 미리 이야기했잖아.

책을 싸는 모습을 후배가 보더니 스님께 알렸나 보다. 행자가 나를 찾는다. 스님께서 부른다며 빨리 오란다. 배낭을 다 싸고 요사채로 가니 스님은 마루에 미숫가루를 타 놓고 나를 기다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인기척에 눈을 뜨고는 미숫가루를 내 앞으로 살짝 민다. 비록 왜소한 여자의 몸이지만 반짝이는 눈동자와 강인한 얼굴은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다. 미숫가루 한 모금을 마시니 속이 다 시원하다.

"류 군,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잠시 나와 생활 한 적이 있지? 천성이 착하고, 행동이 민첩하여 나와 함께 절에서 생활하자고 했더니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시더군. 그러면서 류 군이 합격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본다고 했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일찍 하늘나라 가고. 자, 여기 등록금 있으니 내일 학교 가서 등록하고 다시 열심히 공부하게나. 이번에는 꼭 합격할 거야."하며 신문지로 꼭꼭 싼 돈을 나에게 준다. 나는 이 돈을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잠시 생각하다. "스님 제가 돈을 벌면 제일 먼저 이 돈을 갚겠습니다." 하고는 돈을 받았다.

다음날 등록을 하러 직행 버스를 타고 청주를 가는데 왜 그리 서러운지…. 하얀 먼지를 날리며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의 다섯 시간 동안 울었다. 힐끗힐끗 곁눈질하는 옆자리 아주머니를 의식해 참아 보려고 했지만 터진 봇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내 생애 다시는 이런 날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좀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 마음이 답답할 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인해 나태해 질 때면 나는 오성암으로 달려간다. 그 곳에 가면 40여 년 전의 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스님과 함께 심었던 낙엽송은 그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 내기 위하여 오르던 제비봉은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로 나를 감싼다. 스님과 함께 불공을 드리던 대웅전의 부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나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로 반긴다.

"한 세상 살아보니 어쩌더냐? 네가 원하던 것 다 못 이루었다고 아직도 마음 아프더냐? 아니면 구운몽에 나오는 양소유처럼 세상 즐거움 느껴보니 기분이 좋더냐? 삶이란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너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지. 산다는 것은 우리가 셀 수 없는 수만 가지 일로 가득 찬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라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일생 찾으며 헤매고 있으니 인간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더냐." 스님의 낭랑한 법문이 오늘도 제비봉의 메아리가 되어 답답하고 허전한 내 가슴속으로 자꾸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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