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거목 박맹호 민음사 회장 별세
출판계 거목 박맹호 민음사 회장 별세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7.01.26 10:50
  • 호수 3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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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84세 보은읍 비룡소 출신
송찬호 시인이 수상한 김수영문학상 제정
▲ 민음사 박맹호 회장.

보은읍 장신리 비룡소 출신으로 한국 출판계의 거목인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지난 1월 22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05년 간이식 수술을 받는 등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출판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 정도로 열정을 보였던 고인은 책을 사랑하다, 책을 만들다, 그리고 사라졌다. '이렇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한 매체의 인터뷰처럼 평생 책을 만들다 영면했다.

그의 출판 인생은 1966년 시작된다. 청진동 옥탑방에서 약사였던 아내의 패물 팔아 마련한 돈으로 1인 출판사를 시작한 그는 아동·청소년 서적 브랜드의 이름이 된 비룡소와 황금가지 등 민음사 50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8개 브랜드·누적 1만종을 펴낸 '출판 명가(名家)'를 이뤘다.

"가끔 길을 가다 수십 층짜리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한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 저 빌딩을 올렸을 테지만 나는 평생 책을 쌓아 올린 셈이다. 어느 쪽이 더 보람찬 인생일까."

고인 박맹호 회장이 지은 자서전 257쪽에 나오는 구절인데 책을 만들며 산 자신의 인생이 보람이 있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삼산초등학교와 서울 경복 중학교,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한 고인은 사업가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보은의 거부 고 박기종 옹의 장남으로,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문학에 빠진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1953년 '현대공론' 창간 기념 문예 공모에 '박성흠'이란 필명으로 응모해 단편 '해바라기의 습성'이 당선되면서 문학청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자유풍속'을 응모했지만, 자유당 정부를 풍자한 내용이 문제가 돼 탈락했다. 이후 이를 안타까워한 한운사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의 청탁으로 한국일보 일요판에 소설 '오월의 아버지'를 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다 1966년 5월 서울 종로구 청진동 옥탑방에서 백성의 올곧은 소리를 담는다는 뜻의 민음사(民音社)를 설립, 그해 처음으로 펴냈던 책 '요가'가 1만5천권이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돼 민음사를 출판계에 이름을 올렸다.

고인은 민음사를 통해 특히 문학의 저변을 넓히고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3년 시작한 '세계 시인선'은 고은, 김현, 김주연 등 당대 최고의 시인과 문학평론가가 번역하고 원문까지 함께 실은 국내 최초의 시집이었고, 1974년 김수영, 김춘수, 정현종, 이성부, 강은교의 이름으로 출범한 '오늘의 시인 총서'는 선풍적 인기와 함께 단행본 출판의 본격 가로쓰기 시대를 열었다.

1973년 '세계 시인선'을 처음으로 펴냈고 1974년에는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등 '오늘의 시인 총서' 1차분 5권을 펴내 시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6년 계간 문학지 '세계의 문학' 창간, 1977년 한수산(부초)을 1회로, 박영한(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사람의 아들)을 스타로 만든 '오늘의 작가상' 역시 응모 원고를 심사해 선정한 최초의 문학상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유종호가 초대 편집위원이었던 계간지 '세계의 문학'이 문청(文靑)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음은 물론이다.

1981년에 제정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김수영 문학상은 오늘의 젊은 시인들에게 활발한 창작의 장을 열어 주고 있다.

마로면 관기리에서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송찬호 시인이 지난 2000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인은 문예이론 사상과 학술 활동은 물론 출판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9년 제33대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부회장을 맡았으며 1985년에는 한국단행본출판협회 2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2005년 2월에는 45대 출협 회장으로 당선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 주빈국 행사 등을 성공적으로 치러내 주목을 받았고 2007년에는 '거실을 서재로'라는 캠페인으로 책 읽기 문화를 선도해왔다.

이같이 출판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국무총리 표창, 1985년 대통령 표창, 1995년 화관문화 훈장, 2006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인문학 발전에도 애써 2001년 서울대에 민음 인문학 기금 3억원을 기부한 데 이어 2008년에도 서울대에 인문학 강좌 기금으로 2억원을 기부했다.

보은에도 각 학교 도서관 및 보은도서관에 민음사에서 간행한 다양한 도서를 기증한 고인은 지난 2016년 6월에는 보은군에 보은읍 장신리 임야 2만 2천400㎡를 기증했다.

이 땅은 고인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아 관리해온 것으로 공시지가만 해도 1억2천여만원, 실거래로 4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것이어서 지역을 놀라게 했다.

당시 고인의 동생인 박상호(80) 전 충북도의회 부의장이  보은군에 기탁서를 전달했는데 "형님은 붉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던 고향집과 가을 황금 들녘에서 메뚜기를 잡던 어린시절 고향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며 "이 땅을 보은 주민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해 줄 것을 희망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고 박맹호 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씨와 장녀 상희(비룡소 대표이사), 장남 근섭(민음사 대표이사), 차남 상준(사이언스북스 대표이사), 큰 며느리 김세희 민음인 대표, 둘째며느리 김현희 아주대 미디어학과 교수가 있다. 지난 2015년 SBS '서바이벌 오디션 K팝스타 시즌4'에서 청아한 목소리와 담백한 창법으로 YG, JYP, 안테나 뮤직 대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들고 유희열이 토이 앨범에 객원 보컬 참여를 부탁했을 정도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박윤하씨도 고인의 손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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