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내 유일 여성 한국전쟁 참전자, 마로 수문 김종예 어르신
군내 유일 여성 한국전쟁 참전자, 마로 수문 김종예 어르신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5.06.17 21:39
  • 호수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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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없어야죠"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가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15살 앳된 소녀가 대전의 63육군병원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무서운데 숨이 끊어져 뻣뻣한 시체를 알코올로 닦고 광목에 풀을 먹인 것처럼 빳빳한 가제로 칭칭 감은 후 영안실로 보내는 고통도 어린 소녀는 감내해야 했다. 65년이 지나 팔십 고령의 할머니가 된 지금도 그 때 겪은 전쟁의 고통을 생생해 기억하고 있다.
조만간 한국전쟁 발발 65주년이 되는 6월 25일이 돌아온다. 군내에선 유일하게 간호사로 전쟁을 감당한 김종예(80) 어르신은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없어야지. 전쟁으로 나는 중학교도 중퇴하고 의사였던 아버지도 잃고 가족 생업현장에 뛰어들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 정도로 고생고생 하며 살았지. 참 힘들었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내가 참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했지
삼승 원남에서 민재의원이라는 병원의 의사였던 아버지 덕에 김종예 어르신은 삼승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당시 보통의 사람들은 꿈조차 꾸지 못했던 대전여중을 진학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3남3녀의 맏딸이었다.
원남에서는 유일하게 2층집에서 유복하게 생활했던 단발머리 소녀는 대전중학교에 다니던 큰오빠와 함께 하숙을 하며 공부에 전념,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전쟁은 소녀의 꿈을 앗아갔고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버지마저 빼앗아가 부유했던 집안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다.
난리통에 학교를 그만두고 원남 집에 내려와 있던 소녀를 63육군병원으로 데려간 것은 상원남에 살던 아버지의 절친 배씨 성을 가진 중대장이었다. 하나라도 벌어야 가족들이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린 소녀는 가장의 마음으로 간호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이 63육군병원에서 간호 보조자가 된 것이다.
피가 범벅이 된 광목을 빨고 치료시간이 지체되고 피 붙은 옷을 미처 갈아입히지 못하자 한여름 무더위 속에 구더기가 생기는 것도 보고, 전쟁 상흔자들이 빨리 치료를 안해준다며 험한 쌍욕을 듣고 숨이 떨어진 전사자들은 알코올로 깨끗하게 소독해 광목으로 감아 영안실로 보내는 일을 수없이 해냈다. 이후에는 공군 훈련소에서도 간호업무를 보며 3년간의 기나긴 전쟁을 치렀다.
원남에서 살던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은 배 중대장의 주선으로 대전 경부선 철길 바로 아래 '하꼬방' 하나 마련해 거처를 옮긴 후 어린 동생들은 공부대신 공장에 나가고 사모님 소리 들으며 호강했던 어머니는 낮에는 동아연필 공장에 나가고 밤으론 경부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국수를 말아 팔며 자식들을 지켰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해나갔다.
"그 때 내 나이가 15살이었어. 어린 게 알면 얼마나 알겠어. 지금도 생각하면 끔찍해. 어떻게 지나갔나 몰라. 험한 꼴 많이 봤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린 소녀가 겪기에는 너무나 끔찍했던 전쟁사였지만 그 당시엔 누구나 겪었던 개인사정으로 묻혀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였던 2005년 3월 6·25 전쟁 참전 사실이 조명되면서 김종예 어르신은 참전 유공자로 선정됐다. 군내 유일 여성 참전 유공자가 된 것이다.

◆엘리트 신여성 마로의 중심인물이 되다
전쟁 통에 간호경력을 쌓은 소녀는 휴전 후에는 개인병원에서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도왔던 김종예 어르신은 1959년 한글타자, 영문타자 과정까지 수료했을 정도로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그 당시 학교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 등 행정기관에서도 일일이 손 글씨를 쓰고 원지를 긁어 등사해 사용했을 정도로 모든 문서를 손글씨로 작성했던 시기였다. 차트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인기를 끌었던 때였기 때문에 타자가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때 김종예 어르신은 사무능력까지 갖췄던 것.
대전여중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어르신은 가정형편 때문에 포기한 학력을 타자 자격을 갖추는 등 무엇이든 배우는 쪽에 관심을 돌렸다. 직장생활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 대전생활을 접고 고향 삼승면을 거쳐 마로면 수문리에 정착해서는 엘리트 신여성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지역주민 계몽에 앞장섰다.
밥을 지을 때마다 한줌씩의 쌀을 모으는 절미저축으로 주부들의 목돈 마련을 돕고, 흙으로 돼 있던 부뚜막을 시멘트로 개량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새마을 구판 사업을 벌여 월말 정산시 이용실적이 높은 사람들에게 이익금을 더 배당해 구판장 이용을 장려하고, 탁아소 운영으로 농번기 가정의 일손을 덜어주기도 하고, 방학 때면 학생들의 공부도 지도해주는 새마을 부녀회장을 지냈던 것이다. 땅 한 뙤기가 없어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지만 6, 70년대 마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을 정도로 부녀회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1975년 김종예 어르신이 40살 되던 해 공채로 들어간 마로농협 부녀부장 자리는 그녀에게 물만난 고기처럼 살게 했다. 지금과 같은 취업패턴으로 따지면 늦은 나이의 취업이었지만 무엇이든지 열정을 발휘하는 근성이 있어 마로농협 입사 후 김종예 어르신은 여성 리더로서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군내 농협 중 가장 많은 지도사업을 펼쳐 조합원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1990년 마로농협보다도 컸던 보은농협은 물론 도내 그 어느 농협에서 해내지 못했던 노인대학을 개설해 2기까지 배출하고 여성대학도 1기를 배출한 것이다.
이같이 지난 75년 입사해 95년 퇴직할 때까지 20년간 마로농협 부녀부장으로 잔뼈가 굵었던 김종예 어르신은 58세가 정년인데도 60살까지 농협직원을 지냈다. 농협 직원 중에는 아마도 유일무이한 사례일 것이다.
농협 퇴직 후인 1996년에는 구병산 적십자봉사회를 결성해 초대부터 10년간 회장을 재임하면서 논을 임대해 직접 농사지어 얻은 수입으로 형편이 어려운 가족을 도와 "역시 김종예 회장"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고, 금녀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농협 이사 선거에 출마해 군내에선 처음으로 여성 이사로 당선되는 등 농협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여성 리더로서의 능력을 발휘한 김종예 어르신은 2005년 사회복지 증진 부분 자랑스러운 군민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마로면을 움직여온 인물인 김종예 어르신은 엘리트 신여성으로서의 능력을 지역에 모두 쏟아놓은 것이다.
슬하에 2남1녀를 둔 김종예 어르신은 이제는 지역사회의 리더에서 물러나 마로면 수문1리에서 장남 이윤화(55, 남보은농협 마로지점)씨와 며느리 서미숙(53)씨, 그리고 같이 살다 얼마 전 분가한 장손자 이응백씨와 손자며느리, 둘째 손자 이응선씨와 며느리, 여기에 증손들까지 4대의 살핌을 받는 할머니, 어머니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종예 참전 유공자는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없어야지. 전쟁을 겪은 후 얻은 매 순간순간 찾아온 지금이라는 시간, 나는 참 행복하다"며 만면에 환한 미소를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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