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 오창 운봉서각원 박영덕씨 가족
장안 오창 운봉서각원 박영덕씨 가족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5.05.13 21:24
  • 호수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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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자전, 부전여전 가족 모두 각자(刻字)장인
▲ 전통서각 장인으로 유명한 박영덕(사진 뒤로 가운데)가족. 앞줄 왼쪽이 큰딸 해원. 가운데가 부인 이미화씨. 오른쪽이 작은 딸 지원양, 아들 성원군이다.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고 싶은 일이 아닌데도 어쩔 수 없이 그 업에 종사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경제적 이익도 얻는 사람은 참 행복 할 것이다.
장안면 오창1리에 사는 운봉서각원의 박영덕 선생은 27년간 각자(刻字) 장인의 세계에 푹 빠져서 재미있게 사는 것이 참 행복해 보인다. 자녀교육에 독재하지 않았는데 부인 이미화(51)씨와의 사이에 둔 큰 딸 해원(24), 작은 딸 지원(21, 안동대 민속학과), 막내인 아들 성원(18, 보은고 2년)이도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낯선 각자와 옻칠, 배첩을 배우는 등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러면서 아주 즐겁게. 5월 가정의 달에 가족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박영덕(52) 선생의 가족을 소개한다.

◆청남대 '대통령기념관' 현판
운봉(雲峰) 박영덕 선생은 각자(刻字) 장인으로, 각종 대전에서 입상하고 전국 각지에 그의 작품이 소장, 게시돼 있고 이미 많은 언론에 대서특필된 유명인이다. 요즘 그는 5월 중 개관할 예정인 청남대 대통령기념관 현판 각자(刻字)에 몰두해 있다.
1년 반 가량 건조과정을 거친 수령 100년 이상된 강원도 삼척의 적송을 길이 3m, 폭 71㎝ 두께 5㎝ 규격으로 다듬고 속을 파내 '대통령기념관' 이란 글자를 양각했다.
그리고 약간 붉은 빛을 띠는 갈색(多紫)을 테두리에 입히고, 속은 소나무 송진이 겉으로 배어나지 않게 단청 먹색으로 칠하고 글자는 흰색으로 마무리했는데, 그 어느 현판보다도 고급스럽고, 격조가 있어 보인다.  현판에 품위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으나, 품위까지 느껴진다.
특별히 이상이 없고 대통령기념관이 없어지지 않는 한 아마도 대통령기념관 처마 밑 항상 그 자리에는 운봉 선생의 각자 작품이 게시돼 있을 것이고 전 국민을 넘어 청남대를 찾은 외국인들도 감상하게 될 것이다.
그의 각자 작품이 게시돼 있거나 보관하고 있는 곳은 청남대뿐만이 아니다. 충북도청에는 2010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각자부문 입선작인 단산별곡이 걸려있고, 수원 화성박물관 홍재전서 륜음 목판과 인천 가천박물관 유가사지론 경판이 있다. 충북 문화재인 석보군 묘각 현판과 경북 기념물인 사별왕릉 영사전 현판, 보은의 상현서원 현판 및 중수기, 괴산 화양서원 만동묘 현판과 옻칠에 금박을 한 청주 송상헌 선생 사당 및 천곡 기념관 현판, 세종시 초려 역사공원 및 갈산서원 현판도 그의 작품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전국 도처에 그가 각한 작품이 게시된 것은 순전히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는 그의 고집이 낳은 결과로 전국에 전통 서각, 그것도 목판까지 할 줄 아는 각자장인 중 꼽을 정도로 극소수 장인 중의 장인이다.
지난해부터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의 준천첩 모본 제작에 참여하고 훈민정음 언해본 등 규장각 책판문화재 인출사업을 주관하는 것이 그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각자의 거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각자장인의 길, 험로였다
9남매인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운봉 선생의 청년기는 농고 졸업 후 공무원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장안면 오창1리에서 "가난은 아버지대로 끝내야 한다"며 농사에 전념한 평범한 일상이었다.  농고를 나온 덕에 당시는 한 번도 해본 사람이 없었던 참깨 멀칭 재배로 남들보다 10배가 넘는 수확량을 얻고, 남의 논 4천평의 벼를 탈곡해준 대가로 얻은 벼 가마니를 마당에 한가득 쌓아놓기도 했으며, 염소 한 마리로 시작한 축산을 소 12마리까지로 불려놓기도 하는 등 아버지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농업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농군으로서의 실력이 탁월(?)했던 선생이 생뚱맞게도 농사가 아닌 각자(刻字)장인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군대에서 만들어졌다. 부대 내 후임병이 쉬는 시간이면 나무판에 조각하는 것을 재미있게 지켜봤던 운봉 선생은 제대 후 낮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밤이면 나무판에 글자 새기는 것 취미생활을 즐겼다. 밤늦도록 서각을 하다 늦잠자는 아들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농사짓는 사람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나지 않는다"며 혼내기 일쑤였지만, 서각의 재미를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았으니 잘했는지 못했는지도 모른 채 서각을 즐겼던 그가 1988년 동천 송인선(대전) 선생 문하에서 서각을 배우며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이게 나의 미래"라는 것을 느꼈고 "이제 내가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으니 하산하라"는 스승 동천선생의 명(命)은 시외버스로 대전을 오가며 배운지 6년 만에 들었다.
1996년 현재의 자리에 국비와 지방비 지원으로 운봉서각원이란 작업실을 만들어 서각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계속한 운봉 선생은 농군 서각가로 매스컴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동창회, 사회단체, 종친회 등에서 현판 작업의뢰가 들어오는 등 서각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칼을 놓지 않았고 6년간 보은~대전을 오가며 배운 실력으로 이제 내 인생에도 서광이 비치나 싶었는데 IMF가 닥쳤고 막노동판에서 번 일당으로 궁핍하게 생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각자(刻字)에 대한 열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선생은 당시를 회고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모든 고민도 작품에 몰입하면 사라질 정도이니 각자를 하며 물아일체를 느꼈을 정도. 고난의 시기였던 3년여간 칼을 잡아 각한 금강경 8폭 병풍이 태어났고 처음으로 큰 대회에서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각자를 하며 고난을 이겨낸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인 오국진 금속활자장에게 서각보다 한 단계 위라고 할 수 있는 금속활자 주조법과 목판 제작기법을 2년에 걸쳐 사사, 2002년 금속활자장을 이수했다. 오랫동안 목말라했던 목판을 제대로 공부하면서 연구하고 이후 수년간 작품을 해온 그는 지금 목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목판에 책판까지 역사를 쓰고 있다
목판장인이 되기 위한 담금질은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선생 사전에는 대충대충이 없다. 각자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목판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글자를 제대로 새기기 위해 운곡 김동연 선생에게 서예를 배웠다. 그리고 그 실력은 대한민국 현대 서예대전, 충청북도 서예대전 입선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나무를 잘 다루기 위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목판용 나무를 소금물에 담그고 자연건조하고 음지에서 건조하는 등 치목(治木)을 문헌, 전문가를 통해 배웠다. 그래서 산벚나무, 돌배나무, 대추나무 등이 목판용으로 좋다는 것도 익혔다.
목판을 만들기 위해 자른 나무를 대패한 후 사포질로 표면을 다듬고 목판이 틀어지지 않도록 마구리를 대기 위해 끌로 마구리할 나무속을 파내 목판을 끼워 맞추는 등 전통방식의 목수작업도 스스로 익혔다.
농도를 맞춘 먹물을 목판에 묻혀 한지에 인출하는 것을 하다보니 한지에 대한 공부도 하고, 옛 고서처럼 책을 매는 배첩을 배우고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옻칠까지 배워 원주 옻칠 공예대전 장려상을 수상하고 문화재 수리기능자 과정을 공부해 문화재수리 칠공 기능자 자격까지 갖췄다.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선 입상을 놓치지 않았다. 2009년 34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정조대왕 어필 목판(10판)으로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2010년엔 단산별곡으로, 2011년엔 증도가 책판으로 입선했다. 2012년에는 목판으로 특선을 차지해 문화재청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지난해 훈민정음 해례본 능화판은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운봉 선생은 "수상도 기쁘고 무형문화재 지정도 목표를 두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후세에 전해질 각자, 목판, 책판의 기준점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는 점이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수십년동안 목판에 먹물을 묻혀 계속해서 인출만 하다보니 목판에 떡처럼 쌓여있는 먹을 제거하는 비법도 찾아내고 훈민정음 등 민족적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을 새겨 후세대들에게 그 중요성을 알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꿈"이라고 전했다.

◆자녀들은 모두 그의 전수자
각자의 장인, 목판 장인으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전수자 큰딸 해원(24), 둘째딸 지원(21, 안동대), 막내 성원(18, 보은고 2학년)은 과연 청출어람이 가능할까? 부전자전, 부전여전이다. 그 아버지의 그 딸, 그 아들이다. 뱃속에서부터 아버지의 망치질 소리를 들었고 어려서부터 서각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자녀들의 손엔 장난감 대신 각자를 할 수 있는 칼과 망치가 들려 있었다.
사방팔방 아버지의 작품과 서각 재료가 널려있는 아버지의 작업장은 자녀들에게 놀며, 쉬며, 공부하며 취미생활까지 하는 훌륭한 교육장, 훈련장이 돼 각자는 물론 배첩, 옻칠기능까지 갖춘 전통문화예술인으로 성장했다.
여느 젊은이처럼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보건대 졸업 후 보험회사에 취업한 적이 있는 큰 딸 해원양은 두달 만에 다시 서각세계로 돌아와 그동안 직지문자서예대전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 공예공모전, 원주 옻칠공예대전에서 입상하는 등의 실력을 보였다. 물고기는 물에서 놀아야 가장 빛나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까지 갖춰 지금 아버지와 함께 서울대 규장각 책판본 인출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안동대에서 민속학을 전공하는 둘째딸 지원양도 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과 원주 옻칠공예대전에서 입상했으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성원군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공모전에서 능화판으로 특선과 입선을 차지했다. 중학교 담임과 친구 생일 선물로 자신이 서각 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는 성원군은 일찌감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진학을 결정하고 다음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세계에 몰입하고 있다.
아이들이 거부하지 않고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운봉 선생은 "나무가 광합성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탄수화물을 뿌리로 보내 영양분으로 흡수 몸집을 키우듯이 서각은 원줄기이지만 서각만으로는 바람에 흔들리고 휘둘릴 수 있으니 큰 둥구나무가 되려면 서예, 배첩, 옻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을 자영분으로 삼아야만 이 세계에서 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며 "내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는데 27년 걸렸는데 아이들은 단 5년이라도 기간을 단축시켜 진짜 작품을 할 수 있게 하는게 목표"라는 아버지 운봉 박영덕 선생.
"이 분야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없지만 우리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크다"며 "가업을 물려받아 아버지의 이름을 먹칠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녀들.
각자(刻字), 목판, 책판, 옻칠, 배첩의 과정을 모두 익힌 청출어람의 싹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라 가정의 달 5월 신록을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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