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청원군에게 선점당하고 있었다
이곳은 청원군에게 선점당하고 있었다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0.02.11 10:01
  • 호수 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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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길따라 … 390리 둘레산행 2구간
원평고개~가고리고개~512.7봉~455.6봉~봉황도리비(10㎞)

우리신문 '보은사람들'과 속리산악회(회장 조진)가 함께 하는 보은군 둘레산행 2구간 산행은 지난 7일 실시했다. 1구간 종점이었던 산외면 원평리 싸리재에서 시작해 내북면 봉황리 전원주택지를 지나 달천을 건너 봉황도리비까지 10㎞거리다.

둘레산행에 함께 한 25명이 우리 땅을 밟는 소리가 경쾌했다. 경사 7, 80도에 달하는 오르막 구간을 움직일 때마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대장간 담금질 같았다.

아침 기온이 다소 쌀쌀해 처음에는 손끝이 시렸지만 산행으로 인한 열기로 온몸이 후끈거렸고 훈풍도 볼 살을 훑고 지나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2월의 산은 온통 갈색뿐인 무미건조함 그자체이지만 조금씩 봄이 움트고 있었다. 망울이 솟아오르고 얼었던 땅이 열리며 내는 봄의 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겨 본다.

 

◆25명의 공비 토벌단
산외면 원평리와 청원군 미원면 계원리를 경계로 하는 싸리재에서 둘레산행길이 시작됐다. 1구간 산행 때의 날씨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았고 눈도 없어서 발걸음이 그래도 가벼웠다. 다들 속도를 낼 정도였다.

산 아래서 멀리 있는 산을 보면 올망졸망 어우러져 있고 봉우리가 낮거나 그보다는 조금 높거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얕잡아보면 안된다. 그 안으로 들어가 능선을 타보면 거기서 거기는 절대 아니다. 산은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능선을 넘도록 허락하지 않고 고통을 준다.

이번 산행 구간에는 7, 80도 되는 오르막이 몇 군데 있었다. 오를 때는 한 발짝 옮기기가 힘들 정도로 다리는 천근, 만근이었다. 겨우 산 정상에 오르니 다리 급한 경사길이다. 차라리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이 좋겠다 싶은데 오를 때 다리에 너무 힘이 들어간 탓인지 내리막길에서는 다리가 약간 휘청거린다. 잘못하다간 고꾸라질 수도 있겠다 싶어 다리에 힘을 줬다.

이날 처음 둘레산행 길에 합류한 종곡리에서 오셨다는 어르신도 생각보다 힘들다며 힘겨워 했다. 앞서가던 선두그룹이 쉬고 있는 사이 후미그룹은 어르신과 속도를 맞추고 말벗을 하며 힘을 보태 선두그룹과 합류해 간식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조진 회장은 검정깨가루를 토종꿀로 뭉친 보양식을 회원들에게 건넸다. 작은 송편크기의 깨뭉치 2개였는데 배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어르신도 배낭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복분자술과 귤 등을 내놓으며 채웠던 배낭을 가볍게 만들었다. 힘들 때는 정말 배낭이 어깨를 짓누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프다. 그럴 때는 물도 나눠 마시며 비우는 게 상책이다. 어르신은 쉬면서 기운을 모아 다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후미에서 떨어지지 않고 일행과 함께 해 목적지까지 무사산행을 했다.

박희용씨는 선두그룹의 오르막 산행을 보고 "산에 잠입한 공비 토벌단 같다"고 표현했다. 많은 인원이 배낭을 메고 흩어져서 산을 오르는 모습이 정말 군인이 완전군장을 하고 잠입해 누군가를 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날 공비 토벌단 같았던 25명 중 여성 산악인들은 전체를 인솔하는 최웅식 등반대장과 함께 선두그룹에서 뒤처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갔다. 대단한 건각들이었다.

원평리에서 가고리에 닿는 동안 잠깐 보은군과 청원군의 경계를 놓쳐 헤매기도 했다. 산 경사 7, 80도가 넘는 급경사지에 벌채한 나무들이 그대로 누워있는 곳을 빠져나오느라 생고생을 했다. 이날 산행 중 가장 힘든 코스가 아니었나 싶다.

 

◆국수봉도 청원에 뺏겨
2구간 둘레산행을 하면서 지나온 마을은 원평리 원들과~가고 더구리~어온 은골~이식 배쉰개(배진개)~봉황 모래부리이다.

원평리 원들은 산외면내에서는 두 번째로 들이 넓고 조선시대 관리와 행인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축원(杻院)이 있었고, 일제 강점하에는 면사무소, 소학교, 지서도 있고 장도 섰던 면소재지였다. 원평리와 경계하고 있는 청원군 계원리 주민들도 원평 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 그 영화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원평리를 지나서 가고리와 경계인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 가막골 고 개를 거치면 본격적으로 더구리 뒷산으로 오르는 것이다.

더구리 뒷산 정상에 닿으니 청주 삼백리 산행한 팀이 세운 청원의 명산 옥화봉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우리의 국수봉을 청원에서는 옥화봉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보은문화원이 펴낸 지명지에는 국수봉은 더구리 서쪽에 있는 산으로 더구리에서 가장 높고 정상에 측량을 위한 푯대가 있다고 적혀있다.

1구간 산행시 보은군이 손을 놓고 있을 때 대원리 검단산(금단산)을 괴산군에 점령당해 괴산명산으로 개발된 것에 가슴을 치며 분노했던 것처럼 일행들은 또다시 보은군의 국수봉(해발512m)을 청원군의 옥화봉으로 선점당한 것에 분노했다.

청원군은 옥화 자연휴양림을 개발해 국수봉 등산로를 개설하고, 어온리와 이식리 사이에 전망대까지 설치해 옥화 휴양림을 찾는 사람들에게 등산로로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다간 보은군계의 산은 모두 인접 시군에 점령당해버릴 것이 뻔했다. 군계는 군계이지만 경계는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것이고 사실은 더 이상 보은 땅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희망근로나 숲가꾸기 사업으로 군계 전 구간을 정비해 앞으로 지역 주민들이나 출향인 또는 등산애호가들이 찾을 수 있는 탐방코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참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손을 놓고 있는 군 행정을 실컷 욕해서인가 허기를 느낀 일행은 국수봉 아래로 진행하다 이름없는 무덤 주변에 터를 잡고 주린 배를 채웠다. 자연으로 돌아간 이름없는 무덤 주인에겐 미안했지만 '고시래'도 하고 이것저것 맛있는 반찬을 나누며 식도락을 즐긴 후 어온리 은골마을 산행을 계속했다.

이곳에서 성터를 발견했다. 기와나 구들장으로 쓰이던 돌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성터였을까. 아니면 봉화대였을까 일행들은 이런저런 예상들을 쏟아냈다.

그곳은 성터가 맞았다. 지명지에는 칙골에 있는 성재이며 성터 흔적이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온리 조준희(74) 노인회장은 "성이 언제 적에 쌓은 것인지는 몰라도 옛날부터 성터가 있었다고 어른들께 들었다"며 "옛날에는 성터가 있는 성재 아래 골짜기 넘어 운암리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그랬다"고 추억을 회상했다.

성터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어온리 은골, 이식리 배쉰개 뒷산을 밟아 나가 봉황리 모래부리로 향했다.

봉황리 모래부리를 닿기 전 골짜기에 고개가 하나 있었다. 이 고개는 배쉰개와 모래부리(내북 봉황)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로 넘어가는 살구재라는 고개인데 이 재를 넘으면 청원군 운암 터널입구 주변과 통할 것 같았다. 이곳에 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지명지에는 오래된 살구나무가 서있다고 표기하고 있다. 종곡리에서 오 어르신은 자귀나무라고 했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지날 때마다 소원성취를 바라는 마음으로 쌓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라던 소원이 성취됐을까. 살구재를 내달려 닿은 산 정상에서는 이식1리는 물론 이식2리 진사래들, 구 이식초등학교, 달천 건너 내북면 적음리 산마을 공장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구간 공사를 마무리해 시원하게 뚫린 4차선 도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지역의 미래도 시원하게 뚫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쉰개를 끝으로 산외면 둘레산행은 마감이 됐다. 이제부터는 내북면으로 접어든다. 내북면 둘레산행에서 처음 만나는 곳은 봉황리 모래부리 마을이다. 모래부리, 전원주택지를 지나고 달천을 건너 국도 19호선 상에서 이날의 산행을 마감했다.
 

◆산을 뒤덮은 갈색 낙엽
낙엽 빛인 갈색은 가을색이 아니라 겨울 색이었다. 하얀 눈 속에서 튀어나온 지금 산은 온 천지가 갈색 참나무 낙엽들로 뒤덮여 있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발 아래서선 갈색 낙엽 부서지는 소리로 바스락 바스락 거렸다. 겨울산이 건조했지만 물기 하나없는 낙엽이 내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산의 오르막, 내리막을 오가며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울 대로 무거웠지만 그래도 바스락 거리는 리듬감까지 줬다.

산행을 함께 한 이들은 저마다 "옛날 같으면 이런 낙엽들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그로고 보니 산행을 함께 한 이들이 나이는 다 다르지만 70년대, 80년대의 시절을 공감하는 세대였다. 그때 나무를 하거나 산에 깔려있는 낙엽을 갈퀴로 거둬들이는 것이 겨울철마다 하는 일과였다. 나무를 볏짚가래마냥 쌓아 올려 그 이듬해 겨울이 올 때까지 땔감으로 사용했다.

연탄이 나온 후에도 연탄을 아낀다며 연탄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구멍을 열어놓고 겨울 난방은 여전히 나무와 낙엽으로 했었다. 낙엽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의 고달팠던 그 때 그 시절의 삶까지 추억하게 했다.

지금은 낙엽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산은 온천지가 낙엽일 수밖에 없다. 낙엽은 해를 거듭해 쌓이고 또 쌓여 산을 차지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 영양분을 먹고 참나무는 도토리를 많이 만드는 등 나무들이 더욱 튼실하게 자라서 탄소를 먹고 산소를 내뿜고, 도토리나 잣 등의 열매를 산짐승들의 먹잇감으로 보시한다.

이렇게 양분이 많이 저장돼 있어서일까 아직 겨울이 남아있는데 철을 모르는 생강나무와 진달래는 벌써 망울을 동그랗게 세상 밖으로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운지·영지버섯 등 갖가지 버섯들도 피어나고 있었다.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죽어라고 오르던 산에서 발견한 최대 즐거움이었다. 다음 3구간 산행 때에는 봄의 교향곡 서막이 울리지 않을까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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