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창씨개명 거부한 산대2리 문화류씨 선조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거부한 산대2리 문화류씨 선조들
  • 편집부
  • 승인 2013.02.27 23:13
  • 호수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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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강요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투쟁의 슬픈 역사

한국의 뼈아픈 역사 일제강점기.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의 역사는 후손들에게 빛바랜 역사가 아니다. 꼭 기억하고 알아야 할 우리 선조들의 눈물겨운 역사인 것이다. 올해로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4년이다.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일본은 식민지 수탈정책에 이어 1939년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씨족관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명을 일제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단행하였다. 우리 선조들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긴 일본의 숱한 만행 가운데 하나인 창씨개명. 조선총독부는 1940년 2월 11일에 접수를 시작해 8월 10일까지 창씨를 완료하도록 하였다.

일본의 탄압이 두렵고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에 동참한 이들도 있었지만 목숨을 위협받고, 강제 징용을 당하고, 식량 배급에서 제외되는 등 온갖 탄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들의 이름을 지켜낸 이들이 있다.

보은 산외면 산대2리의 문화류씨 선조들이 바로 그들이다. 산대2리는 문화류씨 집성촌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일제의 갖은 협박과 강요에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씨족문화를 지켜내려는 용기 있는 자들의 위대한 투쟁이었다.

취재를 하기 위해 산대2리에서 만나기로 한 문화류씨 후손인 류흥열(83, 청주 금천동) 옹은 문화류씨 창씨개명 고증자료가 묵직하게 담긴 가방 하나를 들고 나오셨다.

# 산대2리, 효행에 근간을 둔 '삼효촌’
산대2리는 문화류씨 집성촌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류온(柳蘊)이 1670년 낙향하면서 산 속에 터가 있다하여 산대(山垈)라 했는데,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집 대(垈)를 큰 대(大)로 바꿔 산대리(山大里)로 개명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 보은군이 행정구역 명칭을 정비하면서 원래 이름인 산대(山垈)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산대2리는 삼효촌이라고도 불린다. 삼효란 효행자가 지키고 실천한 것으로 첫째, 어버이를 우러러 받드는 일, 둘째, 어버이를 욕보이지 아니하는 일, 셋째, 어버이를 잘 봉양하는 일로 문화류씨 마을 선인들이 지키고 실천한 수칙이었다.

"씨족문화의 근간은 효행으로 우리 선조들은 부모를 잘 섬기고 자손을 잘 가르치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씨족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창씨개명을 용납할 수 없어 목숨을 걸고 이름을 지켜낸 것이다"
류흥열 옹은 씨족문화를 지켜내려 한 선조들의 효행 정신을 말해주었다.

1913년 산대2리 주민들은 문화류씨 대종계도 조직해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씨족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선조들의 업적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대종계 기록지에 비문을 기록하였으나 일본인들의 반대로 비석은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 문화류씨 창씨개명 집단 거부
식민지 국민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한 나라는 식민지 점령 국가 중 일본이 유일하다고 한다.
문화류씨는 천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이름을 일제식으로 개명하는 것은 선조들에게 씻지 못할 누가 되는 것으로 여겨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당시 류효석, 류효준, 류효영 등 3인이 창씨개명 거부를 주도하였으며 창씨개명거부에 동참한 이들 중에는 실종되거나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창씨개명거부사적비’에는 일제의 탄압을 감당할 수 없었던 류효준은 어린 자녀를 데리고 경성으로 피신 갔다 실종되었고, 문화류씨가 살던 집에서는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1904년 발간한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목각판과 400년 이상 된 장서가 모두 소실됐는데, 이는 일제의 소행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류효영의 아들 형제, 손자, 종렬 등 또한 일제의 협박을 피해 방랑하며 피신생활을 하다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는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류흥열 옹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창씨개명을 거부한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 피신생활을 많이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창씨개명을 안 한 학생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강제 징용을 보내고, 식량 배급도 주지 않았다. 누구는 마을 입구 굴참나무에 결박을 당한 채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의 총검 앞에서 창씨개명을 거부한다는 것은 보통의 의지와 결의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산대2리 마을 뒤편에 당시 상황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증거물이 있다.
1915년 세워진 류병호의 묘비가 그것이다. 충청남북도, 경상북도, 강원도 등 전국에서 모여든 100여 명의 제자들이 류병호에게 수학하였고 스승의 주검을 슬퍼하며 제자들이 묘비를 세웠다. 그런데 류병호의 아들 2명이 창씨개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본인 첩자가 도끼로 묘비를 찍고 두 동강을 낸 것이다. 묘비는 광복 이후 후손들이 시멘트로 다시 붙여 아픈 생체기가 지워지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선조들의 창씨개명 거부를 알리려고 노력해온 류흥열 옹
창씨개명이 이루어지던 당시 류흥열 옹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창씨개명을 안 해 학교에 가면 일본인 선생에게 쫓겨나 운동장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서야만 했다. 어느 날, 일본, 중국 등을 다니며 외국 문물에 개화되었던 할아버지가 산외초등학교 일본인 교장을 만나 손자의 앞날이 걱정되는 마음을 전하자 일본인 교장이 자신의 집에 류흥열 옹을 살도록 했다. 일본인 교장은 사범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자로 창씨개명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류흥열 옹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살도록 했으며 류흥열 옹이 속해있던 학급은 교장이 직접 수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수 있었지만 류흥열 옹은 중학교에 진학 할 수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학으로 공부하다 광복이 되고 중학교 편입 시험을 본 후 중학교 2학년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청주고등학교와 청주대학교를 다닐 때는 산대2리에서 왕복 8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류흥열 옹의 열정은 배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58세부터 창씨개명에 관한 자료와 선조들의 창씨개명 투쟁 고증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20여 년 동안 힘든 상황에서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방 한 칸을 차지할만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며 창씨개명을 거부한 선조들의 역사를 알려온 것은 일본이 강요한 창씨개명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뜻을 품었기 때문이다.

2002년 후손들이 산대2리를 창씨개명 거부 사적지로 지정신청하면서 관계 자료를 수집 보완하던 중에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200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고초를 겪은 문화류씨 후손으로는 류흥열(83, 청주 금천동) 옹과 류도기(89, 보은 강신) 옹 두 분만이 생존해 있다.

산대2리에는 창씨개명거부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던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우리 지역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어 우리 지역 선조들의 훌륭한 역사를 길이 남기고 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길 바란다. 지역의 학교와 교육청 등 교육 기관의 관심이 더 많이 필요한 듯하다.

한편, 산대2리는 불국사, 삼년산성, 정이품송 등 보은의 명소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보은미니어처공원을 건립하고 마을의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꿈꾸고 있다. 미니어처 공원 안에 창씨개명거부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니 예쁜 미니어처도 구경하면서 역사 공부도 하면 좋을 것 같다. 산대2리가 창씨개명거부사적지로 그리고 보은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김춘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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