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타임」지의 기고가인 조지 M. 테이버는
자기가 쓴 시론(時論)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정치적 이념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아마 국가주의일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종교를 제외한다면, 다른 어떤 명분보다도
국가주의의 이름으로 더 많은 피가 흘려졌다.
여러 세기 동안 민중 선동가들은 광신적인
군중을 선동할 때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이웃 민족 탓으로 돌렸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 이면에는
다른 민족, 다른 인종, 다른 국적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외인 공포증 즉 낯선 사람이나
외국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주로
친구들이나 가족들에 의해 조장된 것”임을
사회학자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면담을 해본 사람들 가운데 77퍼센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외국인과 직접 접촉해 본 적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기적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부모로부터 어느 정도
이기심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증오가 대립하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종교는
무슨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종교가 사랑을
장려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북아일랜드와
중동과 인도, 단지 세 곳의 예만 보더라도
긴장이 감도는 이유 저변에 종교적 불화가
깔려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중동 지방에서 아시아에서
반미 감정이 격화되는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국의 모순된 행동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만과 종교적 편견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평화가
교란당하는 원인은 종교적 불화가 아니라
정치적 불화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조직화된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정치적 편견이나 민족적
편견을 극복할 정도로 강한 사랑을 심어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와 그밖의 프로테스탄트의
수많은 기독교 종파들은 많은 신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행하는
폭력과 편견을 용인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나 관습들을 논박하려고
하는 데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그 종교나
그 종교를 믿는 신자들에 대항하여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까?
(펌)「종교 백과 사전」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에서는
이렇게 솔직히 시인합니다.
“근동과 유럽의 역사를 보면
종교 지도자들은 거듭거듭 다른 종교를
폭력적으로 공격할 것을 요구해 왔다.”
발전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놓으신 잘 알려진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가
“손을 뻗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제자리에 도로 꽂으십시오.
칼을 잡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 : 51-52; 요한복음 18 : 10-11)
개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좋은 의도로 한 것이든 나쁜 의도로 한 것이든
사랑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사랑 많으신 하느님을 본받으며 생활하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 1서 3 : 10, 15절 4 : 20, 21)
참 종교라면 사랑의 본을 따라야 하는데,
그러한 본 가운데는 심지어 적에게도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 : 44-45절은 이러합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불의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리[십니다].”
이 세상 신 사탄마귀는 인류에게 증오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